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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the ‘Reading’ Category

The Quest : Energy, Security, and the Remaking of the Modern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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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전쟁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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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aparam.wordpress.com/2015/11/09/the-quest-energy-security-and-the-remaking-of-the-modern-worl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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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쪽.

베네스엘라, 네덜란드병, 자원의저주…

차베스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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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逆) 미다스의 손.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석유는 베네스엘라 중앙정부 수익의 70퍼센트 이상을 벌어 주었다. 이런 수익을 둘러싼 경쟁과 분배를 놓고 볼이는 이전투구가 석유국가 경제의 중심 드라마가 되면서 후원과 후견주의(clientelism)와 소위 ‘지대 추구 행위(rent-seeking behavior)’가 횡행했다. 이것은 석유 생산보다는 석유에서 나오는 ‘지대’, 즉 정부 수익의 몫을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한 ‘사업’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창업 풍토, 혁신, 근면, 경쟁 지향적 성장 경제의 개발 등은 새로운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뒷전으로 밀렸다. 경제는 유연성이 사라지고 적응과 변화의 능력을 잃었다. 그 대신 국가의 관리 경제체제가 강회되면서 보조금, 통제, 규제, 관료주의, 대형 프로젝트, 미시관리가 늘어나고 부패가 횡행했다.언제나 그랬지만 석유, 가스와 관련된 엄청난 규모의 세입은 부패와 지대 추구의 온상이었다.

베네수엘라 학계 일각에서는 이런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20세기 중반에 베네수엘라라는 석유때문에 그리고 베네수엘라 국민의 기업 정신이나 생산성과 관련 없는 자연의 선물 때문에 부유한 국가라는 사고가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요약했다. “정치 활동은 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 그 자체였다. 베네수엘라 국민 대다수의 생산성과 기업 정신에 의존하는 지속가능한 창출은 뒷전이었다.”

석유국가와 그에 수반되는 자원의 저주에는 두 가지 특성이 더 있다. 하나는 네덜란드병이다. 이 용어는 네덜란드가 1960년대에 시달렸던 병리적 현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가스로 인해 새로운 돈이 흘러들어왔지만, 가스업을 제외한 데널란드 경제 각 분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국가의 화폐는 과대평가되었고 수출품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올라갔다. 결국 수출은 내리막 길을 걸었다. 국내 산업은 값싼 수입품과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경쟁력을 잃어갔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사업체들이 도산했다. 어느새 사람들의 입에서 네덜란드병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치료 방법 중의 하나는 가스 수익의 일부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국부펀드가 글로벌 경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 되었지만, 국부펀드를 고안해낸 데는 이런 병리적 현상을 막기 위한 예방적 차원도 일부 작용했다. 즉, 이런 갑작스러운 세입의 큰 물줄기를 흡수하여 경제로 유입되는 양을 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네덜란드병을 격리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둘째로 이보다 더 석유국가의 기력을 소진시키는 병은 고질적인 재정적 경직성이다. 재정적으로 경직된 정부는 점점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 소위 ‘역 미다스의 손’이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극도로 불안한 유가로 인해 정부 수익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유가가 치솟으면 사회의 기대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정부는 가능한 한 빨리 지출을 늘려야 하는 압력을 받는다. 그래서 보조금을 더 많이 풀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더 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석유는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매우 자본 집약적인 산업이다. 따라서 석유산업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 못한다. 결국 정부는 그만큼 프로젝트와 복지와 재정 지원 헤택에 돈을 풀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국제 유가가 내려가고 국가의 수익이 떨어질 때 정부는 지출을 삭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예산은 이미 책정되었고, 프로그램은 발주되었고, 계약은 시행 중이고, 기관은 이미 만들어졌고, 직업은 창출되었고, 사람들은 고용된 상태이다. 게속 늘어나는 지출에 제돌을 걸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어설프게 제동을 걸었다가는 강력한 정치적 반발과 사회적 분열이라는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정부는 또한 에너지 수출국으로 당연히 생게를 위한 재정 지원 혜택으로 국민들에게 석유와 천연가스를 매우 싼 가격에 제공해왔다. 이것은 에너지 낭비와 비효율적인 사용을 초래하고 아울러 수출 감소로 이어진다. 지출을 늘리라는 압력을 무시했다가는 정부의 존립 자체가 위험에 빠진다.

지출을 줄이는 것보다 좀 더 쉽게 ‘역 미다스의 손’의 효과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이 있다. 돈을 찍어내면 된다. 그러나 그 효과는 짧다.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국제적인 차관이다. 이렇게 하면 돈이 계속 돌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빚을 지면 이자도 내고 원금도 갚아야 한다. 빚이 불어나면 이자도 불어나 국가부도 사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석유국가가 아니더라도 소득 수준이 낮아진다고 지출을 따라서 줄이는 것을 좋아하는 유권자는 없다.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름은 일부 경제학자들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기가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유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고 확신한다. 오일머니의 물결은 영원히 높게 일고, 재무부의 수도꼭지는 다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석유 세입이 갈수록 위축되어도 가능한 한 빨리 석유로 번 수익을 풀어놓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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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치는 어렵다.

최근 논쟁을 보면 확실히 2008년도 금융위기 후유증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고 그것이 계속 쌓여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한계치에 다다른 것일 수도.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가 크게 충돌하는 지점 같다. 이리하든 저리하든 세계 경제가 조만간 풀리지 않는다면 억지로 짜내고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도 크게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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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한국 내수 쪽이 지나치게 많이 가라 앉았고 그게 고용과 소득 쪽에서도 계속 압박을 가하다 보니 한계치에 다다른 것일 수도. 그 결과물이 닭통령이 강제로 쫒겨 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지도. 지금 또한 그렇다. 이렇게 쌓인 것을 억지로라도 풀지 못하면 다음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경제 문제와 정치문제는 따로 떼어 내어서 생각할 수 없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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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세계 경제가 조만간 많이 풀리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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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메커니즘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환율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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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에너지 전쟁”을 다시 읽고 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네. 예전에 정말 내가 읽었던게 맞나 싶을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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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2008년 금융위기가 엄청난 후유증을 뒤에 남기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그가 내밀고 있는 정책들, 유럽에서 이는 회오리 같은 것들, 일본에서 보이는 아베 정부의 형태, 중국에서 보이는 시진핑….. 모두 같이 연결해서 봐야할 것 같은 생각도 막연히 든다.

2008년 이후 10여년이 흘렀는데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1920,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처럼 그리 길지 않기를 바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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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July 16, 2017 at 15:36

The Search for Modern China 1 – Taip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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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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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북부의 린칭과 마찬가지로 홍슈취안도 카리스마적 태도와 강력한 종교적 확신을 통해 그의 영적 세력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린칭과는 달리 홍슈취안은 지역의 분파 세포조직을 통해 비밀스럽게 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설파하고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며 유교와 조상의 사당을 공공연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이 지역민에게 반감을사 홍슈취안은 한때 본거지를 광시로 옮겨야 했으나, 지방 당국을 공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도는 게속할 수 있었다. 1847년에 그는 광저우로 돌아와 미국 남부의 침례파 교인인 아이자커 로버츠와 성서를 공부했다. 그 해 말 홍슈취안은 광저우를 떠나 그의 첫번째 개종자 가운데 하나인 절친한 친구와 만나서 광시 성 동부의 험준한 츠칭산 일대에서 배상제회를 조직했다.

이 외딴 지역에서 홍슈취안의 운동은 퍼져 나갔고, 객가와 산간지대의 좡족, 야오족으로부터 개종자를 늘려 나갔다. 그리하여 1849년에는 1만명의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그에게 합류한 삼합회 조직원들의 영향 탓인지 그의 사상은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만주족의 박멸도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감동적이고 힘있는 연설로 만주족이 사악하고 간교하다고 공격했다. 그보다 훨씬 온건한 언어로 통치 왕조를 비판했던 뤼류량의 운명을 생각하면, 홍슈취안의 용기는 가히 무모할 정도였다. 그러나 홍슈취안에게 통치 왕조에 대한 도전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만주족은 유교 신앙의 힘이 중국인을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기 전까지 그 순수성과 영기가 중국에 존재했었던 하느님에 맞서 싸우는 악마였기 때문이다.

홍슈취안은 넘치는 열정으로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모았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고문들 가운데는 양슈칭이라는 일자무식에 고아인 츠징산 출신 석탄 광부가 있었는데, 그는 천부적인 군사 전략가로서 재능을 발휘했다. 19세인 스디카이는 지방의 부유한 지주집안 출신이었는데, 집안 사람들 대다수의 재산을 홍슈취안에게 헌납하게 하여 홍슈취안의 금고에 거의 10만 냥을 채워 주었다. 개종자 가운데 또 다른 중요한 집단은 지역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동부 광시의 산악지방에서 발달된 폭파나 굴착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서 나중에 성벽을 파괴할 때 큰 활약을 했다. 광부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가담했다. 전당포 주인(이들은 중앙금고를 관리했다), 법조인(이들은 정부구조를 조직했다), 청군이나 의용군 출신의 군인과 더불어 적어도 잘 알려진 두 명의 여성 비적두목과 해적 출신자가 여럿 있었다.

1850년에 이르면 홍슈취안의 추종자와 개종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그의 집단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조하며 군율을 만들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부패, 성욕, 아편 흡연을 엄하게 다스리고 기독교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중앙금고에 모든 돈과 값진 물건들을 모으고 교도들에게 변발을 자르고 앞머리를 기르게 했으며 여성을 따로 분리하여 여성 장교가 운영하는 독립된 부대를 편성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배상제회는 각지에서 활개치던 수십 개의 비적집단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도광제가 1850년에 사망하자 함풍제는 전에 아편 금지 특사였던 린쩌쉬를 1845년 이후 유배되어 있던 서북지방에서 다시 불러들여 이 운동을 진압할 특별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린쩌쉬는 츠징 산에 당도하기 전에 사망했다.

1850년 12월에 홍슈취안을 츠징 산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파견된 청의 정부군이 무참히 패배하고 만주족 장군이 살해되었다. 1851년 1월 11일에 홍슈취안은 배상제회 회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태평천국, 곧 ‘지극히 평화로운 나라’의 천왕임을 선언했다. 대규모 정부군을 피해 본거지를 떠나게 된 태평군은 1851년 가을까지 광시-광둥의 경계지에서 싸우다가 북쪽으로 올라가 융안시를 점령하고 거대한 현금 금고, 식량, 새로운 조직원을 확보하여 6만 명 이상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이제 새로이 제정한 7일제 기독교 태양력에 따라 자기의 운명을 관리하면서 태평군은 1852년 봄에 다시금 전진했다. 그들은 광시의 성도인 구이린을 공격했는데, 불굴의 투지로 싸운 새로운 객가 여성연대의 영웅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점령에 실패했다. 여름에 그들은 북쪽의 후난으로 진격하여 창사를 공격했지만 2개월 간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여기에서 새로운 교도를 모으기 위한 태평천국의 선언문은 더욱 분노에 찬 어조로 변했다. “중국인은 아직도 자신을 인간이라 여길 수 있는가? 만주족이 중국을 더럽힌 이후로 억압의 불길이 하늘에 닿고 부패의 독이 황제의 자리를 더럽히고 악취가 사해에 퍼지고 악마들의 영향이 제국을 압박하는 동안 중국인은 비굴해지고 사기가 떨어져서 기꺼이 만주족의 백성과 종이 되었다.”

거의 저항받지 않고 달려운 태평군은 1852년 12월에 둥팅 호 동쪽에서 웨저우로 들어서면서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웨저우는 풍요롭고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그때까지 태령군이 거쳐 온 가난한 지역과는 달랐다. 여기에서 그들은 5천 척의 배, 무기와 화약 저장고 등 어마어마한 전리품을노획했다. 이때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들이 줄을 이었다. 12월에 한커우를, 1853년 1월에는 우창을 점령하여 홍슈취안은 많은 선박과 지방 금고에 있던 160만 냥을 확보했다. 1853년 2월에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안칭을 장악했으며, 여기에서 30만 냥의 동과 100문의 대포, 그리고 큰 곡물창고를 얻었다. 3월에는 거대한 난징의 중심부를 손에 넣었는데, 당시 난징은 소규모 경비병력만이 방어하고 있었다. 성벽이 폭파되고 중심부가 대포의 포격을 받았으며 성안 거리에 불교승려나 도교승려로 가장한 태평군이 사전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함락될 수 밖에 없었다.

5천 명 가량의 군대를 포함하여 난징의 주민 4만 명이 성의 내부 요새로 후퇴했지만, 태평군의 계속되는 공격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태평군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만주인을 죄다 붙잡아 의도적으로 태우거나 찌르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이것은 악마가 중국인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홍슈취안의 작전이었다. 3월 말에 왕관을 쓰고 용포를 입은 홍슈취안은 16명이 메는 황금 가마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 옛 명 왕조의 황궁에 거처를 정했다.

태평천국은 천왕인 홍슈취안의 공식적 권위 아래 11년간(1853 ~ 1864) 난징에 자리잡은 천국을 다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슈취안은 실질적인 권력을 제자인 양슈칭에게 이양했다. 양슈칭은 자신이 성령, 하느님의 목소리 자체이며 그의 법-여러 차레의 영적 교류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이 예수의 동생인 홍슈취안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음을 태평군에게 확신시키려 했다. 문서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졌던 태평천국의 정책들은 놀라울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남녀의 격리와 아편 흡연, 매춘, 춤, 음주의 완전한 금지를 원칙으로 하는 금욕주의가 통치수단의 한 요소였다. 재산은 공동 금고에 보관하고 이론상으로는 모두 공유하기로 했다. 태평천국은 진군과정에서 그리고 난징에서 모두 1800만 냥을 얻었기 때문에 분명히 풍족해 보였다. 과거제가 다시 시행되었고, 이제는 중국어 성서와 홍슈취안의 종교적 연설이나 문학작품에 근거하여 치러졌다. 여성은 특별 거주지의 행정단위로 조직되어 관료사회에서 감독관의 지위에 오르거나 여성만의 특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에서 가장 뛰어났던 것은 지방의 군대 편성체계와 연관된 토지제도로서 그때까지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도 가운데 가장 이상적이고 포괄적이며 짜임새 있는 권위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토지는 태평천국에 속한 가족과 신도들에게 가구 규모에 따라 배분되었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분배 받았다. 수확물은 각 가정의 생존에 필요한 양만 남기고 나머지는 거대한 공동 곡물창고에 저장했다. ‘양사마’의 감독 아래 25가구가 한 단위로 조직되었는데, 그는수확량을기록하고 분쟁을 판결하며 젊은이의 성서교육과 교리교육을 지도하고 안식일마다 예배를 관장하는 일을 했다. 양사마는 자신이 보살피는 가구 가운데서 지역군으로 봉사할 사람을 선발했다. 군대에 선발된 사람은 엄격한 훈련과 수련을 받아야 했으며 암호나 무기 사용, 함정 만드는 법을 배웠고 전투 중 부상당한 사람이나 병자를 돌보는 의무대에서 구조활동도 했다. 동쪽이나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거나 수비대의 식량과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군사가 난징 기지에서 또 다른 지역으로 진군해 갔다. 그 결과는 “어디에도 불평등이 없고 누구도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으리라”는 태평천국의 언명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순사적, 이념적 열정과 완벽한 통치라는 이상주의적 꿈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은 청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청의 무지막지한 학살로 완전히 제거되었다. 왜 태평천국은 그토록 유토피아적인 이념을 내걸고 엄청난 속도로 숱한 승리를 거두고도 성공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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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이유는 집단 지도력의 와해였다. 홍슈취안은 형제의 연을 맺은 몇몇 주요 태평천국 추종자들을 ‘왕’으로 봉하여 그들의 지휘 아래 서로 협력하며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장 재능 있는 지도자 가운데 두명은 1852년 전쟁 중에 죽었고 가장 명석한 생존자들 – 특히 홍슈취안의 츠징 산 시절 초기 추종자들인 양슈칭과 스다카이- 은 그의 신임을 잃었다.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었더 양슈칭은 1856년 왕궁에서 습격을 받아 암살당했는데, 이는 홍슈취안이 지시한 것이었다. 스다카이는 줄곧 신의를 지키며 살아서 태평천국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되었지만, 사이가 안 좋았던 태평천국의 장군들에게 부인과 어머리를 잃자 난징을 떠났다. 그는 쓰촨에서 독립국을 세우려 도모했으나 청군에 붙잡혀 1863년에 살해되었다.

가장 뛰어난 측근들이 사라지자 한때 대단한 권위를 지녔던 홍슈취안의 지위는 흔들렸다. 그는 위험스러울 만큼 비효율적이며 명확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우창에서 베이징으로 북진할 기회를 놓쳤듯이 그는 난징 점령 이후 장악한 주도권을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후궁들에게 둘러싸인 궁중생활의 감각적 쾌락과 창세기에서 누가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탐독하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그는 반만(주) 성전이라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대중적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 실패했고 경건한 종교 지도자로서의 명성에도 오점을 남겼다.

반만(주) 감정을 자극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태평천국이 난징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일 그들이 난징을 거대한 거점도시로 발전시켰더라면, 그리고 홍슈취안이 그곳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는 굳건한 기반 위에 군림했더라면 태평천국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징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태평군 점령자들-이들은 대부분 객가 출신으로 기묘한 차림새를 하고 억양이 특이했으며 여성들은 발이 컸다-이 외국이나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생소하다고 생각했다. 거주자들은 경제생활의 변화, 공동 금고의 설치와 시장 규제, 민간인의 성별, 직업별 분리, 행동양식에 대한 엄격한 법 적용 등과 같은 태평천국의 정책에 분노했다. 태평천국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청군으로 도망가고 밀고하거나 배신하는 행위가 자주 발생했다. 그에 비하면 청 초기 도르곤의 유연하 정책이 일반적인 대중의 호감을 얻는 데 훨씬 성공적이었다.

난징 이외의 농촌지역에서도 태평천국은 실패했다. 그런 곳에서는 모든 신도의 공동창고와 토지의 균등 소유라는 태평천국의 이상이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장쑤, 안후이, 저장의 광대한 지역을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그 이북과 이서 지역도 차지했지만, 극적인 토지개혁을 추진할 헌신적인 인물이 부족했고 낙심한 농민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세금 징수자가 생겼을 뿐이었다.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식량과 보급품을 얻으려면 태평천국의 부대들은 수백km를 떼지어 다니면서 농가를 약탈해야 했다. 이러한 식량과 보급품이 필요하기는 청군도 마찬가지여서 두 집단의 군대는, 한때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방대한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또한 태평천국은 같은 시기에 발생한 다른 두 반란 세력인 북쪽의 염군과 남쪽의 홍건족과 협력하는 데도 실패했다. 만일 그들 사이에 연대가 이루어져서 어떤 구체적인 활동-반명(나라) 반란자 리쯔청과 장센중이 1630년대에 다른 비적 지도자들과 시도했던 것 같은-이 있었다면 서구로부터 그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던 청이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금욕주의와 종교적 주장에 담긴 극단적 성격은 다른 반란군과의 건설적인 협력을 어렵게 했다.

한편 태평천국의 명분은 서양의 동조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처음에 외국인들, 특히 선교사들은 사회개혁과 망해 가는 비타협적인 만주족의 섬멸을 약속한 기독교 혁명세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윽고 홍슈취안의 기독교 신앙이 기이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무역상들은 태평천국이 아편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서구 열강은 (난징)조약을 통해 새로이 확보한 기득권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태평천국의 상하이 점령을 막기 위해 청나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853년에서 1855년 초반까지 상하이의 한인 지구를 지배했던 삼합회 비밀조직원의 지원으로 태평천국의 상하이 점령은 임박한 듯했다. 반란 말기에 증기선, 곧 얕은 물에서도 운항이 가능한 전함의 지원을 받은 외국인 용병부대가 태평군을 상대로 청군과 함께 싸웠다. 이 부대가 이른바 ‘상승군’으로 처음에는 매사추세츠 출신 미국인 탐헌가인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가, 그가 죽은 후에는 대단히 종교적인 영국인 포병 장교 찰수 ‘차이니스’ 고든이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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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태평천국

File:Taiping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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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태평천국%20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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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May 21, 2017 at 19:09

Posted in I'v ever read

s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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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談(주담) – 재클린 원주를 여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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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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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소리가 저렇게도 들리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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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May 13, 2017 at 10:31

Posted in Music

… is worth reading – Pax Mo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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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7.01.20 – 도대체 ‘친문패권주의’가 무엇인가?

  • [정희준의 어퍼컷] 문재인만 아니면 된다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202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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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 정치의 관행이란 무엇일까. YS, DJ, JP 시절의 보스정치, 이후 이어져온 계파정치이다. 이 작동방식에서의 핵심은 타협이다. 그렇다면 한국정치에서 타협이란 무엇? 간단히 말해 두 자로 거래, 네 자로 나눠먹기인데…

문제는 당 대표 시절 문재인은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비타협적 성향 때문에 그는 많은 유력 정치인들과 멀어졌다. … 그렇다면 그 반문 정서의 원천은 무엇일까. 주목해야 할 것은 여태까지 문재인에 관한 거부감을 표시했거나 비난했던 야권 인사들이 하나 같이 다선 중진 정치인들이라는 점이다.

흔히 “친노가 다 해먹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친노는 누구인가. 실상 이들은 오랜 세월 진보진영에서 ‘근본도 없는 자들’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문재인은 당 대표를 지내며 당이 계파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결정하고 운영되게 했다. 그 이전 7년간 무려 여섯 개의 혁신안이 만들어졌지만 소속 의원들의 저항으로 모두 폐기됐는데, 문은 기어이 새 혁신안을 관철해 당헌, 당규에 못 박아버렸다. 그 덕에 시스템공천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계파 간 나눠먹기가 불가능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혁신에 따른 온라인 네트워크 정당으로의 전환은 온라인 입당을 가능케 해 무려 10만 명의 당원이 대거 유입됐다. 박지원, 김한길, 정세균 등 계파를 거느린 수장들은 오래 전부터 ‘온라인’에 한 결 같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문재인이 직접 새로운 인재 영입에 나서 지난 총선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하나 같이 다선 기득권 의원들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었다. 이제 자신들의 지분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특히 이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문재인은 자기 사람이 잘려나갈지라도 타협에 나서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 여의도정치의 문법은 당연히 서로의 지분을 보장하며 나눠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차라리 자리를 비워둘지언정 거래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자기 사람은 한 사람도 기용하지 못했고 비서실 부실장마저 공석으로 남겼다.

바로 이것이 문재인에게 붙여진 꼬리표인 ‘정치력 부재’, ‘리더십 부족’의 실체이다. 원칙에 반하는 타협을 거부한 결과다.

친문 패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란 문재인이 나눠먹기를 거부하자 탈당해 떨어져 나간 호남 의원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보장해주지 않자 화가 난 당내 다선 의원들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집어든 프레임일 뿐이다. 그들이 문제 삼는 패권주의적 행태라는 것도 고작 지지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집단행동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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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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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측면에서 일방적으로 쓰여진 글일 수는 있다. 정희준 동아대교수 정치 성향은 내가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한쪽만 거드는 일방적인 글일지라도 곰곰히 읽어 볼만한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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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글쓴이가 “문재인 후보의 부산 선대위 소속으로 홍보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정말 그러한지 확인은 해 보진 않았다. 일방적으로 글을 썼을 가능성도 고려를 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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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April 28, 2017 at 22:40

korea peninsula crisis in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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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 코리아 2017.04.12 – 미국이 1994년에 북한을 폭격하려 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7/04/12/-_n_15957300.html

 

미국의 북폭 계획 저지
6월 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볼 때 미국이 유엔 제재와 별도로 북폭(北爆)을 감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됐다. (중략)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 p.315)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에서 정치과장으로 근무하였으며 미국 국무부의 한국과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세종연구소 펠로우는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김영삼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가 누차 말했듯, 그가 국방부 직원들에게 북한의 핵 시설을 폭격하는 비상대책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페리는 결코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그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페리 전 장관 또한 북한이 서울에 반격을 가할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페리 전 장관은 또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 폭격이 필요하다고 여겼다면 응당 미국의 동맹인 한국과 협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수년간에 걸쳐서 나는 당시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두 명의 미국 관계자와 두 명의 한국 관계자로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트럼프가 ‘군사적 행동’을 언급할수록 북한 문제는 더욱 악화되는 까닭)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과거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말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갈루치를 포함한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당국자들이 쓴 책에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 있다.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그해 6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그런 말에 얼마나 열받았으면, 백악관의 통화 기록을 다시 뒤져보았겠는가. 그리고 이들은 덧붙인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종일관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었고,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북핵 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 협상>, 조엘 위트·대니얼 폰먼·로버트 갈루치 지음) (한겨레21 2009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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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 코리아 2017.04.12 – 트럼프가 ‘군사적 행동’을 언급할수록 북한 문제는 더욱 악화되는 까닭

http://www.huffingtonpost.kr/david-straub/story_b_159336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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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9.03.04 – 김연철의 냉전의 추억 전쟁 문턱까지 갔던 94년 6월

북-미 협상 길목 막은 YS 고집이 ‘불바다’ 발언 불러… 언론도 ‘사재기’ 부추겨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4455.html

 

전쟁 막았다는 YS 회고는 거짓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하고 그때 대판 싸웠습니다. 그때 내가 싸우지 않았다면 아마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거예요.” 이 말은 이후 ‘한국도 모르게 미국이 전쟁을 검토했다’는 기억을 만들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말은 거짓이다. 갈루치를 포함한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당국자들이 쓴 책에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 있다.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그해 6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그런 말에 얼마나 열받았으면, 백악관의 통화 기록을 다시 뒤져보았겠는가. 그리고 이들은 덧붙인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종일관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었고,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북핵 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 협상>, 조엘 위트·대니얼 폰먼·로버트 갈루치 지음)

그때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무능과 대북 강경파들의 오기였다. 미국에서 군사적 선택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이 멀어졌을 때 논의되기 시작했다. 누가 협상의 길을 막아섰는가. 김영삼 정부의 책임이 크다. 한-미 관계에서 ‘한바탕 소동’으로 기록된 1993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서 한-미 양국의 외교 실무자들이 합의한 ‘포괄적 접근 방안’을 김영삼 대통령은 현장에서 뒤집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과 미국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고, 1994년 2월18일 이른바 ‘슈퍼 화요일 합의문’을 만들었다. 그해 3월1일 화요일을 기해 팀스피릿 훈련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남북 특사 교환, 그리고 3월21일 북-미 회담 개최를 동시 발표하자는 묘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이후 어떻게 대응했는가. 특사 교환을 위한 남북 대화를 북-미 회담 이전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렸다. 남북한의 상호 불신이 여전한 상황에서 남북 대화를 북-미 대화와 연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제대로 되겠는가. 3월19일 ‘불바다’ 발언은 어쩌면 예고된 사건이었다. 박영수 북쪽 회담 대표는 송영대 남쪽 대표에게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그쪽이 전쟁을 강요하는 데 대해서는 피할 생각이 없다.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송 선생 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그해 5월 국회에서 국방부 장관이 한-미 연합군의 전쟁 계획을 상세히 밝힐 때, 레이니 대사는 미 조지아주로 달려가 오랜 친구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다.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데 앞장서달라고. 카터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카터의 방북은 실수’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카터의 방북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카터-김일성 회담 결과를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김영삼 정부는 위기관리 능력도 없으면서 위기를 부추겼다. 그런 점에서 6월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한국 사회를 휩쓴 사재기 열풍은 ‘만들어진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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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한겨레21에 나온 기사 내용은 모르고 있었지…?

한국 보수 강경파들은 정말 꼴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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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April 12, 2017 at 21:59

the search for moder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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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Jonathan D. Spence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barcode=978898760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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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barcode=978898760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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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람이 지은 “현대 중국을 찾아서 2″편은 오래 전에 구입을 해서 읽었었다. 재미있게 읽었고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2″가 저우언라이가 바로 죽을 때이고 등소평이 살아날 때까지를 내용을 삼고 있는데 지금 시점으로 보면 시기가 너무 오래 전이라는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책을 낸 시점이 그처럼 오래 전이라 어쩔 수 없는 면은 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2″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맞붙으면서 일본을 몰아내고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는 것 부터 시작을 한다. 그것 보다는 아무래도 중국에서 있었던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 부분이 더 인상 깊었지만.

주은래(저우언라이) 평전도 비슷한 시기에 읽어서 내용이 조금 겹치게 위에서 글을 썼을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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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편은 중국 명나라 부터 중국 “청”나라 까지 언급을 하는 것 같은데, 사실 그 시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가 뭐 중국 역사까지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관심도 별로 없었고.

오래 전에 “현대 중국을 찾아서 2″편을 재미있게 읽었어도 1편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고 계속 그랬었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한 번 읽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을 우연히 읽다 보니 관심이 생겼다고 해야할지도. “강희제”를 읽다 보니 “옹정제”도 읽었는데 내가 중국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은 들더라. 이렇게 간략하게 몇 중국 황제를 읽다 보니 “당태종”, “수양제” 도 간략하게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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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읽다 보니 그냥 예전에 읽었던 “현대 중국을 찾아서 2″편이 생각났고 나머지 1편도 읽어야 겠다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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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무지 두껍다. 글씨도 작고. 언제 다 읽을지, 읽을 수는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오래 전에 “현대 중국을 찾아서 2″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 이후에 “현대 일본을 찾아서”라는 비슷한 종류의 책 제목이 보여서 그것도 샀는데 사고서도 읽다 말았다. 한 100여 쪽을 읽었나 모르겠다. 그만큼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역사가 문제인 것이, 역사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시대 상황, 한국 역사와 언제쯤이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내가 일본 역사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에 비해 너무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 역사를 읽기에는 사전 배경 지식이 거의 없으니 읽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재미 또한. 사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이름은 몇 번 들어는 봤지만 이름 뿐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야 임진왜란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니 이름은 너무 강하지만 그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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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책은 샀고 오늘 배달로 왔고 조금 읽어 볼까 싶어서 읽었는데 한 50쪽은 읽었나 모르겠네. 그래도 며칠 전까지 간략하게 읽었던 중국 역대 황제 부분이 많은 도움은 되더라. 무엇보다도 한국 역사와 연결되는게 많아서 그런 것 일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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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황제가 되기 위해 이미 황태자였던 형을 모함하여 죽이고 심지어는 황제인 애비까지 죽였다는 시대가 있었다.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강력한 통제 국가를 유지하였다는 황제도 있었고 제후들에게 비참하게 죽었던 황제는 이미 많으니..

이런 부분이 더 이끌렸던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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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March 23, 2017 at 01:15

Posted in I'v ever read

got permission, restricted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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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2017.03.11- 박 前 대통령, 삼성동 사저 늦게 가는 이유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0985398&lfrom=blog

“탄핵당한 대통령이 언제 청와대를 떠나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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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서 변명을 열심히 해 주는 꼴.
명시적인 규정이 있을 이유가 있나…?

법적인 제약이 심한 장소에 법적인 자격 없이 있는 것이면 당연히 가급적이면 빨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가급적이 문제인데. 짐은 임시로 남겨 놓더라도 몸은 나와야 한다는 것이겠지.

아니면 권한대행한테 요청 및 승인을 받는 모양새라도 취하든가. 중요하게 바라 봐야 할 것은 그것이지.
규정이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자격 또는 허락 없이 엄격히 제한된 장소에 있다는 것.

관저에서 청와대 내부 전화를 사용해도 되는가 문제와, 관저에서 청와대 정보를 습득해도 되는가 문제, 청와대 사람을 만나도 되는가 문제도 규정이 있어야 하나?

그냥 자격이 있냐 없냐 문제 하나면 되는 것이지. 아니면 정해진 절차대로 허락을 맡았나의 여부. 권한대행 있잖어..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면 권하대행한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이것은 상식 이전의 싱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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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MayBeMayBe

March 11, 2017 at 23:11